대학사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주로 결혼이나 커리어 결정 등 자식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개 처음에는 부모가 강하게 의견을 제시하다 마지막에는 자식의 의사에 따라간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아마 주변의 이런저런 사례들을 떠올리다 보면 이 얘기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부모 이기는 자식을 별로 보지 못했다. 내가 접해본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중요한 결정에 부모가 큰 몫을 한다. 애초부터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설사 초기 단계에서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최종 의사결정에는 부모의 생각이 압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말 자식이 부모 의사를 강하게 거역해 이것이 집 밖에 알려질 정도가 되면 자식이 이기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이것은 이긴다는 표현보다 독립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우리 사회처럼 자녀의 미래 형성에 부모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드물다. 당장 교육만 보더라도 사교육 의존도가 매우 높은 우리 환경에서 부모의 능력과 관심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대학진학 무렵부터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려 든다는 다른 나라 얘기는 정말 다른 나라 얘기다.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 품속에서 자란 우리나라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자생력이 생길 리 없다. 능력과 의지가 다 부족한데 어떻게 독립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러다 보니 결혼해 따로 살림을 차릴 때까지는 자식은 부모의 ‘아바타’ 이기 십상이다.

자녀를 상징적으로 품에서 떠나보내는 결혼식도 부모들 행사다. 식장의 하객은 대부분 부모들이 보낸 청첩장을 보고 나타난다. 물론 결혼은 부부의 탄생이란 기본적 의미를 넘어 사회제도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시대나 장소에 따른 형식과 관습이 존재한다. 예전 전통혼례는 연지곤지 바르고 꽃가마 타는 식이고, 요즘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주례 모시고 우당탕 해치운 다음 사진 몇 장 박는 것이 기본 유형이다. 부조금도 옛날과 지금 사이에 묘한 차이가 있다. 금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부조금이 큰일이 닥칠 때 상부상조하는 보험기능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의 투자금 회수 목적이 우선이다. 따라서 아무리 당사자가 친구, 친지만 모아 놓고 조촐한 정원 예식을 올리고 싶어도 부모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설사 한쪽 집안의 부모가 그런 생각을 해도 상대 집안에서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뿌려놓은 돈을 회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건강한 투자자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몇 가지 던져보자. 첫째는 도대체 왜 우리 부모들은 유난히 자녀에 집착하는 건지, 둘째는 이런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부모 의사를 꺾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 인지이다. 특히 학생의 입장에서는 장래 진로에 관한 문제를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와 닿을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툭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는 표현을 쓴다. 과연 희생일까. 물론 자식 사랑이 지극하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며 자식의 행복을 올리는 경지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 자식이 잘되면 나의 행복지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돈이나 시간 등 내 자원을 조금 무리하게 나누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나쁜 선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부모의 노력과 지출만으로는 합리적 선택과 순수한 희생을 구분하기 어렵다.

자식을 재산 증식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자신의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루는 또 다른 자아로 생각하는 부모는 의외로 많다. 대박이 날 수 있는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으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무리한 훈련을 시키는 사례는 이미 흔하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원했던 사회적 성공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별 효과가 없어 보이는데도 무리하게 자녀 교육에 돈을 쓰는 것은 조금이라도 좋은 학벌을 가져야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부모들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엄청난 고통과 위험이 수반되는 각종 고시를 주저 없이 권하는 부모들을 보면 과연 이들이 자식의 행복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저러는 걸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웃기는 얘기지만 교수 자식들 중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를 지겹도록 한 사람들은 굳이 자식에게 그 길을 강요할 필요를 크게 못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유난히 자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지난 몇십 년 동안 급변하고 있는 경제-사회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세대가 바뀌어도 성공의 기준과 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식 세대가 특별히 부모 세대보다 더 유리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경제발전과 함께 상황이 달라졌다. 사회 전체적으로 부유해지면서 개별적 성공의 기회가 빠르게 늘어나게 되었다. 가난한 농사꾼 아들이 공부만 잘하면 넉넉한 중산층으로 발돋음할 수 있고, 좋은 아이디어 하나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나아가 여성에게도 사회적 성공의 기회가 넓어졌다. 아무리 똑똑해도 남편이나 아들의 후원자 노릇에 머물렀던 세상은 더 이상 없다. 하여 부모들은 아쉬운 것이다.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생존에 급급했던 자신들과 달리 능력과 노력만으로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는 자식 세대가 부러운 것이다. 자신은 늦었지만 자식을 통해 자기실현의 성취감을 우회적으로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식의 의사결정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커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의 이런 생각 자체는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 부모의 관심으로 자식이 성공해 둘 다 행복해지면 금상첨화이다. 문제는 과연 부모가 자식을 위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이다.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얼핏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자식을 잘 안다고 해서 그들의 장래까지 부모가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며 이 때문에 오히려 왜곡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 쉽다. 크게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 급변하는 세상일수록 부모의 생각이 편견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겪어온 삶의 경로를 되새기며 자식의 장래를 예견한다. 예컨대 사업을 하며 공무원 등쌀에 부대껴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주저 없이 자식에게 공무원 시험을 권한다. 물론 지금의 자신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주고 싶은 애틋한 심정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스무 살인 자식이 마흔이 되는 이십 년 후에도 공무원이 최고의 직장일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설사 공무원이 좋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고시 같은 외줄 타기 방식이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머지않아 우수한 민간인력이 고위 공무원으로 직행하는 개방직이 훨씬 활성화될 수 있다. 빡빡한 조직문화에 순응하며 관료제의 부품으로 성장하기보다 경쟁적인 시장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의 인적자본을 쌓은 사람이 훨씬 더 우수한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려면 그들이 사회의 주인공이 되는 한참 후의 세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는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의 표준이 자식들이 살아갈 미래에도 이어질 것처럼 착각하며 자식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부모가 지나치게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면 자식은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발견할 기회를 잃을 수 있다. 내가 낳고 길렀다고 해서 자식의 잠재력을 안다 생각하면 착각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 부모가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해 지원했다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진실인지도 불분명하다. 일단 성공하면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다 그럴듯한 법이다. 또 설사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이나 골프채를 쥐고 자란 아이들 중 정말 성공한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자신이 못다 한 꿈을 이룬다고 어린 애를 선택의 여지도 없는 특정 분야에 매몰시키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행위다.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자식이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해 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조합을 가진다. 자라온 가정환경이 이 가치체계에 영향을 주겠지만 그 외의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을 것이다. 좋은 부모라면 자식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 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같은 해답이라도 남이 알려준 지름길을 택하기보다 나 스스로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찾는 편이 훨씬 많이 배운다. 젊은 날의 커리어 선택은 어찌 보면 목적지가 없는 길을 향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불확실성 하에서 다양한 선택을 놓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 실수 없는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나아가 이런 젊은 날의 고민과 방황은 훗날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이를 참고 이겨내는 힘을 길러준다.

이제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만일 내 생각과 부모의 뜻이 어긋난다면 어떻게 할까. 무조건 자기 생각을 내세우기 보다는 대화를 통해 부모를 설득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자식을 경제적, 심리적, 경험적으로 나약한 존재라 인식하는 부모에게 ‘아빠가 살아온 세상과 내가 살아갈 세상은 다르다’, ‘나도 잘 모르는 내 잠재력을 엄마가 어찌 그리 잘 아느냐’ 라고 따지고 나서다간 한 대 맞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면 내 삶은 부모의 종속변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잠시 반항아가 되는 것이 어쩌면 진정으로 부모도 위하고 나도 행복해지는 길일 수 있다.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자.

가장 쉬운 방법은 돌이키기 힘든 결과를 들고 나서는 것이다. 흔한 예로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면 일단 애를 낳아 볼모로 삼을 수 있다. 골프를 강권하는 부모가 싫어 억지로 손을 부러뜨리지야 않겠지만 부모의 압박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을 불쑥 내려버리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부모의 간섭을 피하려다 정작 나 자신이 차분하게 미래를 탐구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덜컥 애를 낳아 무리하게 결혼했는데 몇 년 살다 보니 ‘에그, 그 때 엄마 말 그냥 들을걸…”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많다. 대학 들어와 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부모가 일찍부터 이런저런 자격 시험을 강요하면 확 놀아버려 부모를 포기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만 놔두었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공무원이나 의사로 성장할 수도 있었는데, 부모의 무리한 주문과 자식의 섣부른 대응으로 커리어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반항아가 되더라도 현명한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 그 일차 조건은 나 자신에게 내 능력과 적성을 탐구해 볼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부모의 압박을 피해야 한다. 예컨대 ‘부모님 말씀이 99% 맞지만 저에게도 1% 정도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타협에 나선다. 그리고는 시간을 끌면 된다. 나중 뭐라 하면 1%도 확률은 확률이라고 우기면 된다. 무조건 100% 나를 따르라는 식의 부모에게는 답이 간단하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절대 복종을 맹세한 다음 부모를 가급적 피하며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 최종 판단이 선 다음 단 하루 부모와 맞서면 된다. 이 기간 동안 부모가 고시를 원하면 시험 보는 시늉하면서 펑펑 떨어져 드리면 된다. 자식의 무능에 속상해 하는 부모가 안쓰럽겠지만 멀리 보면 이런 것은 일도 아니다.  

같은 반항이라도 처음부터 부모에게 대들면 서로 마음 상하며 아까운 시간 다 날려 보내기 쉽다. 나아가 반항심리가 지나쳐 섣부른 의사결정을 내리기 쉽다. 긴긴 인생에서 나 스스로를 알기 위해 2~3년 보낸다는데 이를 누가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모가 뭘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부모 편견 때문에 내 미래를 희생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를 잘 알고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부모의 경험이나 판단을 무조건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다. 아직 배움의 단계에 있는 처지에서 부모의 생각에만 의존해 서둘러 커리어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실제 이런 내 생각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내가 괜찮은 대학의 사회과학부를 들어가니 시골 부모와 주변 친지들은 내가 고시에 올-인해 집안을 빛내주길 바랐다. 글쎄 그것이 과연 내 인생도 빛나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나로 하여금 일시적 불효자가 되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고시의 대안으로 유학을 생각한 것도 아니다. 정말 대학 4년 내내 나는 불확실성의 늪에 내 미래를 던지고 살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살아갈 의지와 내 나름의 힘을 빚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문득 유학을 생각하게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내 능력의 한계와 놀기 좋아하는 천성 탓에 높은 학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주변에 자랑하며 행복해하셨다 (1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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